
광복~1960년대 국내 귀금속보석 산업사 연구
© 2021 (by) Fashion and Textile Research Journal (FTRJ). This is an open access journal. Articles are distributed under the terms of the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Non-Commercial License (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4.0), which permits unrestricted use, distribution, and reproduction in any medium, provided the original work is properly cited.
Abstract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examine the evolution of precious metal and gem stores, and to derive the characteristics of this period from the government, industry, and consumers. Correspondingly, the contents of daily newspaper articles during this period were analyzed using Naver's news library search engine. The historical development process is as follows. Before the Korean War, precious metal jewelers operated in Jongno, Namdaemun, and Chungmuro, dealing with gold, silver, and platinum. Large stores not only sold jewelry and watches, but also functioned as craftsmen and watch repairers. After the war, a shopping district for precious metals and jewelry was formed around Midopa Department Store. By 1963, the number of jewelry stores in Seoul increased to about 130 and to about 280 by 1966. The characteristics of the government, industry, and consumers are as follows. The government continued to implement a policy to regulate the precious metal and jewelry industry. Despite challenges, the industry exhibited the potential for foreign currency acquisition and growth through domestic amethyst. Consumers could access information regarding precious metal jewelry in daily newspapers. In the late 1960s, various types of jewelry were distributed in line with an increase in income levels.
Keywords:
jewelry industry, jewelry industry history, jewelry, gem, precious metal키워드:
주얼리산업, 주얼리산업역사, 주얼리, 보석, 귀금속1. 서 론
1.1 연구의 배경
광복 이후 1960년대의 국내 귀금속보석 업계는 수공업 형태의 소매점 중심의 구조였다. 이른바 금은방 시대로 고객의 주문에 따라 수작업으로 제작하던 시기이다. 이후 정부의 수출증진정책의 일환으로 1976년에 현재의 전라북도 익산에 이리귀금속가공단지가 조성되면서 대량생산체제의 산업화 기반이 마련되었으며 1980년대에 호황을 맞게 되었고 현재 약 5조 4천억 원의 시장 규모로 성장하였다(“Korea jewelry market”, 2021).
광복 이후부터 1960년대는 산업화가 진행되기 직전의 시기로 귀금속보석업이 발전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던 시대이다. 대량생산된 기성품이 특징인 산업화의 관점에서 볼 때 이 시기는 미숙하게 보일 수 있으나 관점을 바꿔 고객의 필요에 맞춘 수공예적 개성이 살아있는 시기로 본다면 이 시대의 가치는 재조명 될 것이다. 서양 미술사에서 중세 미술을 암흑의 시대라고 부르지만 종교적 관점에서는 황금기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손맛과 정성이 깊이 있던. 고객의 의견이 들어간 시대”, “특별한 보석을 위한 맞춤 장신구로 하나 밖에 없는 디자인을 만들던 시대”, “점포마다 개성이 달랐던 시대”(Chi, 2011)로 회고하는 주얼리 업계의 원로들도 있다. 산업화 이후 대량생산된 제품들의 홍수 속에서 이제는 다시 수공예와 개성이 고부가가치의 요소로 부각되고 있음을 고려할 때 이 시기에 대한 연구는 중요하다고 본다.
패션 분야에서 이 시기를 단독으로 다룬 논문으로는 1993년(Park, 1993)에 있으며 근대 이후 국내 주얼리 역사에 관한 연구는 매우 미미하다. 다만 부분적으로 이 시기의 주얼리 상황을 다룬 학위 논문 3편이 있다(Chi, 2011; Hong, 2015; Park, 2012). Chi(2011)는 장신구 제작환경과 형태를, Park(2012)은 주얼리에 대한 사회적 정서를, Hong(2015)은 럭셔리 주얼리 브랜드의 전개 상황을 주로 연구하였다. 학술지 논문으로는 1편(Joo, 2008)이 있다. 브로치 착용 양상과 미인대회의 왕관을 주로 다루었으며 이 시기를 장신구의 일시적 쇠퇴기로 보고 있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선행연구와는 달리 산업사적인 맥락에서 접근하여 다음의 내용을 고찰함으로써 당시 귀금속보석업체들의 전개 양상과 특징을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귀금속보석업체의 시대적 전개 상황을 연구한다. 둘째, 이 시기의 특징을 정부와 업계, 소비자 측면에서 도출함으로써 당시의 상황을 입체적으로 파악한다. 이는 향후 국내 주얼리 산업사 연구의 토대를 제공한다는 의의가 있다. 나아가 이 당시에 수립된 정부의 정책이 현재까지도 존속해 업계의 성장에 제약을 주고 있다는 근거 자료로 제시될 수 있음으로써 대정부 건의 시에 활용될 수 있다는 실무적 의의가 있다.
1.2. 연구 방법
본 연구의 시대적 범위는 1945년 광복 이후부터 1969년까지이다. 1970년 이후부터는 귀금속보석업에 대한 정부 정책의 변화가 일어나고 이리귀금속가공단지가 조성되면서 산업화의 시발점을 이루기 때문에 그 이전인 1969년까지로 한정했다. 또한 이 시대는 자료가 희소하고 업계 내에서도 증언할 수 있는 분들이 많지 않아 기록으로 남겨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연구 자료는 금, 은, 백금과 보석, 이를 사용한 제품, 이를 다루는 업체, 정부 정책에 대한 신문 기사이다. 업계에서 발간하는 전문 잡지는 1988년에, 신문은 1998년에 창간되었다. 따라서 이 시기를 연구할 수 있는 인쇄 매체는 일간지와 잡지에 국한된다. 이 시기에 발간된 여성지는 1955년 10월에 창간되어 1970년 4월에 폐간된 여원이 대표적이며, 주부생활과 여성동아는 1960년대 중후반에 발간되었다. 여성지에 비해 일간지가 본 연구의 대상과 관련된 당시의 경제, 사회, 사건 등을 종합적으로 망라하기 때문에 신문기사를 분석했다.
연구 방법은 네이버의 ‘뉴스 라이브러리’ 검색 엔진을 사용했다. 이 엔진은 1920년부터 1999년 사이의 신문기사를 검색해 신문 원본까지 확인할 수 있다. 조선일보, 동아일보, 매일경제, 경향신문, 한겨레가 제공되고 있다. 1차로 키워드 검색을 실시하였다. 금, 은, 백금, 귀금속, 보석, 금은방, 보석상, 장신구로 검색하여 나온 기사들을 내용 분석하였다. 이 과정에서 여러 키워드들이 새롭게 발견되었고 2차로 검색을 확장하였다. 예를 들어 다이아몬드의 경우 다이야, 다이어몬드, 다이어먼드 등 여러 표현이 있으며, 업체와 관련해서는 금은상, 남대문로 2가, 정금사 등이 있다. 현재 보편화된 주얼리라는 단어는 1982년에야 나타나기 때문에 배제하였다. 이로 인해 본 연구의 제목과 용어를 귀금속보석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방식을 반복하여 당시에 사용된 용어에 최대한 근접해 있는 1,032개의 기사를 수집하였다. 이 중 본 연구의 목적에 부합하는 273개의 기사를 최종 선별하여 분석하였으며 광복~1954년의 기사가 17%, 1955~1969년의 기사가 83%이다. 이를 바탕으로 시대별 주얼리 산업의 전개 과정을 정리하였으며 정부, 업계, 그리고 소비자 측면에서 그 특징을 도출하였다.
2. 귀금속보석 업체의 전개 과정
이 장에서는 귀금속보석의 전개 과정을 1955년을 기점으로 광복~1954년, 1955~1969년까지 두 시기로 나누어서 고찰하였다. 1955년을 기점으로 한 이유는 6.25전쟁으로 인한 혼란과 피해가 이 시기 이후부터 어느 정도 안정을 찾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귀금속보석 광고도 재개되기 시작하였고 1954년에는 미도파 백화점, 1955년에는 동화백화점이 개점하면서 주변으로 고급 귀금속보석 업체들이 집적하기 시작하였다.
2.1. 광복~1954년
1945년 광복 이후 38선을 경계로 남쪽에는 미군이, 북쪽에는 소련군이 각각 주둔하였다. 미군정체제를 거쳐 1948년에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어 안정을 도모했으나 1950년에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정치적, 경제적으로 다시 큰 혼란을 겪게 되었다. 1952년 중반부터 전쟁은 소강상태에 들어갔으며 마침내 1953년에 휴전이 되었다.
산업시설의 붕괴로 인해 해외 원조로 부족한 물자를 충당했으며 한편으로는 밀수가 성행하게 되었다. 주로 홍콩이나 마카오, 일본을 왕래하는 선박을 통해 밀수품이 유입되었다. 전시 중에는 일시적으로 멈추었으나 남해안 지역에서는 외항선을 통해 소규모로 지속되었으며 부산 국제시장에는 ‘양키 시장’이라고 부르는 외래품 시장이 형성되었다(Hwang, 1992). 양복과 양장 착용도 증가하였다. 양복지의 경우 대부분 미군 부대나 홍콩, 마카오로부터 유입되었기 때문에 당시의 멋쟁이를 ‘마카오 신사’라고 부르는 풍조도 생겼다(Contemporary Fashion 100 Years Compilation Committee(CFCC), 2002).
광복 이후부터 6.25 전쟁까지 인플레이션이 심화되면서 금값이 폭등을 거듭하였다. 광복 직후에 비해 1946년에는 금 한 돈 도매가가 1,650원으로 7배 올랐으며(“Soaring gold”, 1946), 중국과 북한으로의 밀수출도 성행하였다. 1949년에는 광복 이후 최대의 금 밀매단이 체포되었는데 규모가 약 2억 2천 만 원, 조사에 따라 8억 원대까지도 이를 것으로 추정되었다(“Gold smuggling”, 1949). Fig. 1은 1945년부터 1969년까지의 금 가격 추이이다. 1951년 1g당 16원이던 금가격은 1954년에 87원으로 폭등했으며 계속 올라 1963년에는 220원, 1966년에는 399원, 69년에는 760원에 달했다.
광복 이후 초기 20년 동안은 정부수립과 6.25전쟁 자금, 재정지출 확대, 경제개발 자금 조달 등으로 인한 통화 증발로 물가가 급등하였으며 1960년대 중반 이후에도 경제개발에 박차를 가하면서 고성장, 고물가 현상이 지속되었다(Bank of Korea, 2005). 이에 정부는 1947년, 귀금속의 해외 반출과 소비의 절제를 이유로 금과 은을 비롯한 귀금속에 대한 등록제를 실시하였다. 이에 따라 금이나 은, 귀금속 소지자는 조선은행이나 지정된 대리점에 등록을 하고 비양도성증명서를 받아야 했다. 등록하지 않을 경우 현품을 몰수했으며 허가 없이 매매를 하는 경우에도 처벌을 받았다(“Luxury goods”, 1947).
1950년 3월 18일에는 물품세법을 제정하여 사치품의 세율을 인상하였다. 물품세는 소비세로서 사치품이나 술, 담배 등의 소비를 억제하기 위한 품목에 부과되는 세금이다. 1977년 부가가치세법이 시행되면서 폐지되었으며 개별소비세로 현재까지 같은 목적을 수행하고 있다. 물품 세율은 1종과 2종으로 나뉘어 10~40%까지 규정되었다. 그 중 보석과 귀금속 제품은 제 1종의 갑종(甲種)으로 분류되어 소매 물품 가격의 40%가 부과되었다. 갑종에는 1. 보석, 반보석, 진구, 귀금속 제품 2. 별갑 제품, 산호 제품, 호박 제품, 상아 제품 3. 모피 및 모피 제품, 우모 및 우모 제품이 포함되었다(“Tax increase”. 1950). 이러한 여파로 귀금속보석상들은 다른 업종보다 더욱 심하게 불경기를 겪었다. 전쟁 중에는 금이나 백금, 보석 이나 14K 이상으로 된 장신구는 일체 착용을 금지하는 ‘전시생활개선법’과 ‘국민생활검소화운동’이 추진되었다(“Accelerate the passage”, 1955).
광복 이후부터 전쟁 전까지의 귀금속보석상들의 영업 상황은 신문 광고를 통해 볼 수 있다. 여러 업체들이 광고를 하였는데 광고 문구를 종합해보면 금, 은, 백금을 주로 취급하였다. 조금 더 규모가 큰 경우는 보석과 시계를 판매하였고 세공과 시계 수리를 겸하였다. 종로와 충무로, 남대문 일대에서 영업했다. 종로에는 한청금은방, 대명공사, 충무로에는 보옥장, 명옥당, 대동사, 경미당, 남대문에는 삼창 등이 있었다.
Fig. 2는 명옥당과 대동사의 광고이다. 명옥당은 금과 백금 세공까지 하였으며 보석과 시계도 판매하였다(“Myngokdang”, 1946). 대동사도 귀금속과 보석, 시계 판매 외에 금은세공과 시계 수리를 하였으며 소비자로부터의 매입도 하였다(“Daedongsa”, 1947). 반지와 시계 그림을 통해 당시의 디자인을 가늠해 볼 수 있다.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귀금속보석상의 광고는 자취를 감추었으며 육백만원짜리 순금 혁대가 도난 당했다(“6 million”, 1952)거나 피난 중에도 귀금속으로 사치가 심하다는 흥미 유발성 또는 비난성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2.2. 1955~1969년
1953년 7월 휴전 협정이 된 이후 재건 작업이 본격화되었다. 주된 재원은 외국 원조였으며 1957년부터 본격적인 재정 안정 계획이 실시되면서 인플레이션은 다소 진정되었다(Kim & Joo, 2006). 1963년부터는 박정희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경제개발 5개년 계획, 한일국교정상화와 같은 경제발전 정책이 가속화되었다.
여성복은 양장이 주류를 이루기 시작하였으며 외국 패션 잡지가 유입되면서 유행에 대한 인식도 증가하였다. 1956년에는 디자이너 노라노의 패션쇼가 개최되었으며 명동을 중심으로 유행을 선도하는 양장점들이 활동하였다(CFCC, 2002). 1954년에는 미도파 백화점, 1955년에는 동화백화점이 개점하여 고급 소비의 중심 역할을 하였다.
귀금속보석업체들도 영업을 재개하였다. 종로에 위치한 화신백화점은 6.25전쟁으로 인한 화재로 폐점되었다가 1953년 11월에 입점 업체들을 모집하였다. 귀금속과 화장품, 양품부가 30~40 대 1로 가장 경쟁률이 높았으며 다음으로 주단부, 라사부, 한복부 등이었다(“Restoring Hwashin”. 1953). 화신백화점의 금은부와 동화백화점의 귀금속부는 1955년에 신문 광고를 하여 적극적으로 홍보에 나섰으며 1956년에는 7부 다이아몬드 2점을 1등 경품으로 주는 판촉 행사도 진행하였다.
1961년에는 상권에 대한 순위가 업계에서 형성되어 있었다. 상류층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일급 상권은 미도파 백화점 부근의 명동 일대였으며, 이급은 화신백화점을 중심으로 한 종로 2가였다. 삼급은 제일은행에서 남대문까지와 종로 4가를 중심으로 한 동대문 시장 일대였다(“Up and down”, 1961). 1969년에 이르면 명동 일대의 남대문로 2가에는 정금사, 영창당, 삼일사 등 자본 규모나 판매량, 신용도가 월등한 20여 개의 고급 귀금속보석상들이 밀집해있었다. 초기에는 정금사를 비롯한 10여 개의 금은상들이 있었는데 명동 입구에 미도파가 개점한 후 중산층 이상 소비자들이 백화점 내의 금은부에 몰리면서 금은상들이 미도파 주위에 자리 잡기 시작했다. 스위스와 미국, 일본의 외제 고급 시계까지 판매하고 있었다(“Namdemunro”, 1969). 당시 소공동은 한국의 월가로, 명동은 동경의 긴자로 불리며 고가의 지가를 형성하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명동 입구에서 정금사 금은상에 이르는 상가 일대는 최고의 지가였다. Fig. 3은 1966년 정금사의 위치(“Wall street”, 1966)이며 Fig. 4는 외관이다(“Gold and”, 1971). 이와 함께 1967년에 개점한 소공동의 반도조선아케이드에는 외국인과 고위층 출입이 많았으며 1층에도 금은상이 있어 국내 최고의 고급 상권을 이루었다.
1963년에는 서울에 약 130개의 귀금속보석상이 있었다(“Precious metals”, 1963). 한편 을지로 3가에는 ‘경화보석공예학원’이 문을 열었다. 귀금속보석상인 경화당의 이종근 사장이 설립한 학원이다. 세공 기술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금공과(金工科)와 칠예금공조각과를 운영하였다. 각각 3개월 과정으로 하루에 150분씩 수업을 했다(“Kyunghwa”, 1963). Fig. 5는 경화보석공예학원의 수강생 모집 광고이다(“Kyunghwa advertisement”, 1963).
1966년에는 서울에 귀금속보석상이 약 280개로 증가하였다. 매일경제는 보신양행과 정금사, 삼일사, 보금장, 영창당을 ‘5대 금은상’으로 꼽았다. 이 점포들에서 판매되는 제품과 가격을 보도했는데 다음과 같다.
광택이 좋고 박청 백색이나 설백색의 다이어몬드 반지는 1캐럿에 40만원 내지 35만원에 팔고 있으며 자수정은 최고가 1만 7~8천원, 최하가 7~8천원, 연수정은 5~6백원에서 3~4천원 짜리까지 있고 1백%의 에메랄드는 상가에서 찾아볼 수 없으나 인조화학합성 에메랄드는 보통 7~8천원짜리이며 제일 성황을 이루는 합성석은 7~8천원선에서 팔리고 있다. 그러나 뭐니 뭐니해도 반지 중의 반지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비취반지인데 진짜는 자그마치 1백20만원짜리까지 있지만 이런 것들은 우리나라에서는 3개 밖에 없다고 하며 이외의 비취반지는 20만원내지 30만원에 판매되고 있다. 그러나 가장 많은 사람들로부터 인기가 있고 잘 팔리고 있는 것은 10g에 5천 2백원짜리 순금반지와 백금반지라 할 것이다(‘Ring’, 1966).
당시 고급 점포에서 판매되던 반지의 종류와 가격을 알 수 있다. 천연 에메랄드는 유통되지 않은 것으로 보이며 이를 대신하는 합성 에메랄드가 인기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합성석은 천연 보석의 화학구조를 모방하여 인공적으로 만든 물질로 합성 루비, 합성 사파이어, 합성 오팔과 같은 고가 보석을 대체한다. 유리나 플라스틱으로 천연 보석의 외관만 흉내 낸 모조석에 비해 품질이 좋고 단가도 더 비싸다. 천연 비취도 귀했던 것으로 보인다. 가장 대중적인 장신구는 순금 반지와 백금반지였다.
1966년 3월에는 서울금은상연합회가 창립되었으며 귀금속 검정부를 설치했다. 1967년에는 상공부의 사단법인 설립 허가를 취득하여 전국금은상연합회가 창립되어 전국 귀금속 상인들의 친목과 복리 증진을 도모했다. 현재는 한국귀금속판매업중앙회로 이어오고 있다. 검인제(劍印制)도 실시하였다. 서울의 금은상을 대상으로 금과 백금제품을 검사하여 합격품에 Fig. 6과 같은 태극표지의 검인 마크를 찍어(“To buy”, 1967) 순도를 보장했다.
이 시기 가장 영업이 활발했던 업체는 정금사로 보인다. 1967년 귀금속상 중 납세 순위는 정금사가 1위였으며 영창당, 삼일사, 경화당, 보광당 순이었다(“Taxpayer”, 1968). 또한 같은 해 대한상의가 주최한 제 1회 상점경진대회시상식에서는 귀금속보석 업체로는 유일하게 정금사가 대한상의회장상을 받았다. 정금사의 김문경 사장은 서울금은상연합회의 창립 회장으로도 취임하여 업계의 현안도 처리했다. 1968년에도 세금을 가장 많이 낸 업체는 정금사로 14,340,000원을 납부했다. 2위는보금장, 3위는 영창당, 다음으로 보광장, 미도파, 금성, 경화당, 금성사, 신세계, 보은당 순이다(“Gold”, 1969).
3. 정부, 업계, 소비자 측면에서의 특징
이 장에서는 수집한 기사 내용의 분석 결과를 근거로 정부와 업계, 소비자 측면에서의 특징을 도출하였다. 이 시기 동안 정부는 지속적으로 귀금속보석업을 억제하는 정책을 실시하였다. 어려움 속에서도 업계는 국내산 자수정을 통해 외화 획득과 성장에 대한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또한 소비자들은 귀금속보석과 관련된 다양한 정보들을 일간지에서 접할 수 있었으며 소득 수준의 향상과 더불어 1960년대 말에는 거래량이 급증하고 다양한 보석들이 유통되었다.
3.1. 정부-지속적인 억제 정책 실시
6.25전쟁 이후 정부는 만성적인 재정 적자와 외화 부족을 겪었다. 원조와 차관을 통해 이를 극복하고 성장을 이루어내는 것이 중요 과제였다. 재정 수요를 충당하는 가장 큰 재원인 세법을 개정했으며 소비성 수입 수요 억제에 주력하여 보석이나 보석을 사용한 제품, 귀금속 제품은 수입이 금지되었다. 또한 귀금속과 보석을 사치품으로 규정하고 높은 세율을 부과하여 억제하는 정책을 기조적으로 펴나갔다. 세율이 개정될 때마다 정부와 귀금속보석상들의 마찰이 야기되었다. 업계에서는 단체 휴업을 통해 어려움을 표출하였으며 높은 세율을 극복하지 못하고 폐점되는 사례도 발생하였다.
1961년에는 금과 은에 물품세를 10% 부과하고 기존의 제조과세를 판매과세로 개정하면서 갈등이 고조되었다. 기존에는 3%였으며 보석류는 5%였다(“Gasoline is 60%”, 1960). 업계에서는 보석에 부과하는 것은 수용할 수 있으나 국가적 자산인 금과 은에도 같은 세율을 부과하는 것은 국내 귀금속 가격의 인상을 초래해 국가의 경제력을 저하시키기 때문에 폐지를 하거나 1%로 인하해달라고 주장했다. 판매과세 역시 소비자에게 받기 어려워 사업자가 부담해야 하기 때문에 결국 가격을 인상할 수 밖에 없고 매매가 감소되므로 기존의 제조과세로 돌려주길 요구했다. 이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전국적으로 휴업 시위를 이어갔다(“2nd day”, 1961). 이와 같은 공방은 1960년대 내내 이어졌다. 1966년에는 물품세가 3~5배가 급등하면서 업계의 항의가 고조되었는데 금 가격이 오르면서 과세표준액을 인상했기 때문이었다(“Protest to close”, 1966).
이러한 상황에서도 귀금속보석 거래량은 1960년대 후반으로 갈수록 고조되었다. Fig. 7의 왼쪽은 1968년도의 보석 거래량이다. 보석이 50%, 진주가 13%를 차지하고 있다. 순금을 제외한 것으로 보석 소비가 증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오른쪽은 1966년부터 1969년까지의 귀금속보석 거래량이다. 1966년 7억에서 1967년에는 10억, 1968년 15억, 1969년 20억원으로 매년 약 45%씩 급성장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Precious metals fever”, 1970).
이를 억제하기 위해 1968년 1월부터는 물품세법이 다시 개정되었다. 불필요한 소비를 억제하고 검소한 생활을 하여 투자와 저축 증대를 유도하기 위한 명목으로 사치성 물품의 세율을 중과하였다. 이에 따라 보석과 보석 제품이 가장 많이 인상되어 기존 10%에서 50%로 5배 폭등하였다. 진주와 진주 제품은 10%에서 40%로, 호박, 산호, 상아와 이를 사용한 제품은 10%에서 40%로 급등하였다. 물품세를 부과하기 위해 국세청이 금은보석상에 대한 재고량 조사까지 진행하면서(“28 gold”, 1967) 전국적으로 휴업과 폐업이 이어졌다. 과중한 세금이 누적되고 이후 불경기까지 겹치면서 세금 납부액이 1위였던 정금사마저도 휴업에 들어갔으며 남대문로 2가와 종로 2가에 집중되어있던 유명 업체들이 잇달아 휴업과 폐업에 직면하였다(“Gold and silver”, 1971).
정부의 이러한 규제는 필연적으로 밀수를 야기시켰다. 국내에서는 귀금속보석산업의 바탕이 되는 보석이 거의 산출되지 않는다. 다이아몬드나 루비, 에메랄드와 같이 고부가가치를 창출하는 고가의 보석은 전량 수입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수입 금지 조치와 고율의 세금으로 인해 밀수가 성행했으며 태국과 홍콩, 일본, 한국을 잇는 대규모 국제 보석밀수단까지 가담하게 되었다.
3.2. 귀금속보석 업계 - 국내산 자수정으로 외화 획득
위와 같이 귀금속보석업계는 정부로부터 지속적으로 억제를 받았지만 국내산 자수정과 연수정이 외국인들에게 인기를 얻으며 외화 획득과 수출에 기여하게 되었다. 자수정은 한국을 비롯해 브라질, 멕시코, 남아프리카공화국, 미국 등 전 세계적으로 생산되고 있다. 한국산 자수정은 붉은빛이 감도는 자주색이 짙어 높은 품질을 지니며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 일대가 대표 산지이다.
자수정은 일제강점기때부터 수출되고 있었으며(Amethyst, 1939) 광복 이후에도 일본과 홍콩으로 주로 수출되었다. 1958년에는 일본 오사카에 소재한 상사에서 매월 정기적으로 1,000~3,000 달러 정도의 한국산 보석 수입을 타진하자 상공부는 자수정을 수출하는 상사를 조사하였다(“Investigate and report”, 1958). 또한 국내의 신진산업이라는 업체는 홍콩에 연수정을 수출하고자 허가신청을 냈다. 이전까지는 연수정을 수출한 사례가 없었기 때문에 상공부는 외무부에 해외 시세를 조사하도록 의뢰하였다(“Smorky quartz”, 1960). 1967년에는 일본백화점의 공동 구입 기구인 아시아 상품구매단 일행 22명이 내한하여 한국상품 구매를 논의하였는데 자수정과 나전 제품 등에 관심을 나타냈다.
1960년대에 자수정과 연수정은 방한한 외국인 관광객들이 가장 선호하는 쇼핑 품목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일본인은 자수정을 미국인은 연수정을 많이 구매하였다(“Hanbok”, 1967). 일반적으로 자수정은 백금으로 연수정은 18K, 14K 금으로 세공을 하였다. 자수정은 다이아몬드와 같은 브릴리언트 컷이나 둥근 돔형의 캐보션 컷이 보편적이었고 연수정은 타원형, 원형, 사각형, 삼각형이 많았다(“Crystals”, 1967).
농촌의 소규모 가내 수공업에서 가공된 자수정이 외화 획득에 일조하는 사례가 보도되기도 하였다. 울주군 언양면에 있는 태양의 집이라는 업체로 5명의 하반신 장애인들이 2평 남짓한 작은 공간에서 자수정 원석을 연마하여 주얼리에 세팅될 나석을 생산했다. 이 나석들은 서울에서 반지나 커프스 버튼, 타이핀 등으로 제작되어 반도조선아케이드(Fig. 8., “Bando”, 1965), 종로의 귀금속보석상, 김포공항 등지에서 판매되었다. A급 15캐럿이면 46달러 내외를 받았으며 연간 1만 개 이상이 팔려 3~4만 달러의 외화를 벌어들였다(“Dollar box (10)”, 1969).
1965년에는 일본보석디자인협회가 주최한 공모전에 한국에서 출품한 자수정 목걸이가 장려상을 수상하여 디자인 경쟁력을 갖춰나가기 시작했다. 서울시 남대문로 2가의 삼일상회에서 출품한 것으로 Fig. 9에서처럼 100캐럿에 달하는 자수정의 나석 형태를 그대로 살려 세공했다(“Amethyst pendant”, 1966). 이처럼 자수정이 한국을 대표하는 보석으로 발전하면서 국가 정상들에게 선물로 사용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말레이시아 국왕과 베트남 대통령에게 자수정으로 만든 카우스 버튼을 선물했다.
3.3. 소비자 - 귀금속보석에 대한 정보 향상
정부는 귀금속과 보석 소비를 억제하는 정책을 펼쳤으나 소비자들은 소득 수준이 향상되면서 귀금속과 보석에 대한 관심과 소비 욕구가 고조되었다. Fig. 11은 1인당 명목 GNI로 1953년부터 1969년까지의 흐름이다. 1953년 67달러에서 1961년에는 82달러, 1965년에는 105달러, 1969년에는 210달러로 급증하였다.
이러한 경제적 성장과 더불어 일간지에서도 다양한 정보를 지속적으로 기사화하였으며 소비자들은 보석과 가격, 유행 정보 등을 쉽게 접할 수 있었다. 이 당시 기사들을 종합할 때 아래와 같은 정보들이 특징적이다.
가장 대표적으로는 탄생석과 보석에 대한 정보이다. 탄생석은 태어난 달을 상징하는 보석으로 자신이 태어난 달에 해당하는 보석을 지니면 액운을 막고 행운을 가져온다고 믿었다. 그 기원은 성경 시대까지 올라갈 수 있으며 1912년에 미국의 전국보석상협회(National Association of Jewelers)에서 탄생석 목록을 발표하면서 대중화되었다. 국내에서 탄생석에 대한 정보는 일제강점기부터 시작되어 광복 이후에도 활발하게 이어졌다. 내용은 각 달에 해당되는 보석과 의미 소개가 기본으로 다루어졌으며 여기에 각 보석에 대한 자세한 정보가 확장되어갔다. 예를 들어 4월의 탄생석인 다이아몬드의 경우 원산지 및 등급 기준, 좋은 다이아몬드를 선택하는 법, 보관법, 주의할 점, 착용 예절 등이 다루어졌으며 가격 정보까지 제공되었다. 1967년에는 1부에서 2캐럿까지의 시세가 보도되었는데 1부는 16,500원, 2부 34,400원, 3부 59,200원, 5부 134,900, 1캐럿 400,000원 2캐럿은 1,200,000원에 달했다. 당시 쌀 한 가마니, 80 kg의 가격이 3,750원, 휘발유가 리터당 15.16원(Bank of Korea, 2005)임을 고려하면 상당한 가격임을 알 수 있다. 결혼할 때 가장 많이 사용된 것은 2~3부대로 반지를 만드는 수공비는 1,000~1,500원이었으며 일반적으로 백금 1돈, 3.75 g이 들어갔다(“Diamond ring”, 1967). 탄생석으로 반지를 만들어 약혼녀나 애인에게 선물하는 것이 유행하였다. 약혼 반지는 다이아몬드여야 한다는 통념에서 벗어나 비싼 다이아몬드 대신 보다 저렴한 탄생석으로 의의를 새기자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다음으로는 해외 유행 경향과 스타일링 하는 방법, 해외 유명 보석상에 대한 정보이다. 파리에서는 귀걸이를 많이 하고 오른쪽 팔에 팔찌를 반드시 착용한다(“Trend in Paris”, 1966)와 같은 유행 정보가 전달되었다. 스타일링 관련해서는 옛날에는 귀걸이와 목거리, 팔찌 세 개를 동시에 착용했지만 성장(盛裝)해야 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단독으로만 사용하는 것이 더 산뜻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로프(rope)형의 긴 목걸이는 허리선이 아래로 있는 색 드레스(sack dress)에 어울리며 Fig. 10처럼 두 세 번 감아서 짧게 착용하면 다른 옷에도 무난하다(“Necklace styling”, 1960) 등이 있다.
해외 유명 보석상에 대한 인식도 생기게 되었다. 1962년에는 단성사에서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이 개봉되어 미국의 보석상인 티파니(Tiffany&Co.)가 대중적으로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1964년에는 프랑스의 보석상인 까르띠에(Cartier)가 칼터라는 이름으로 소개되었으며 1969년에는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다이아몬드 경매와 관련하여 귀금속상 카티어 상회로 언급되기도 했다(“10.5 million”, 1969).
이와 같이 보석에 대한 정보와 지식이 축적되고 소비 여력도 향상됨에 따라 다이아몬드를 투자의 관점으로 다루는 기사까지 등장했다. 경제 호황으로 다이아몬드 수요가 세계적으로 늘어 가격이 올라가고 있으며 인플레이션 조짐이 나타나는 가운데 화폐 가치 하락을 방지하기 위해서 돈을 다이아몬드로 바꾸는 경향이 나타나 다이아몬드는 투자 대상도 되고 있다(“Global diamond boom”, 1966)고 보도해 다이아몬드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였다. 이러한 결과 1969년에 이르면 다이아몬드, 알렉산드라이트, 스타루비, 사파이어, 진주, 옥, 비취, 멕시코 오팔, 스피넬, 자수정, 연수정, 공작석, 장미석, 터키석, 호박 등 다양한 보석이 시중에서 보편적으로 유통되게 되었다(“Quality”, 1969).
4. 결 론
광복 이후부터 1960년대까지의 귀금속보석업계의 상황은 학술적으로나 실무적으로 어둠에 묻혀 있던 시대였다. 자료도 많지 않고 제품도 대다수가 녹아 없어졌다. 이로 인해 학술적으로 깊이 있게 연구되지 못했으며 업계에서도 생존해계신 소수 원로들의 기억으로 희미하게 거론되는 정도이다. 이에 본 연구자는 네이버의 뉴스 라이브러리 검색 엔진을 이용해 다양한 키워드로 당시의 기사들을 검색하여 내용 분석을 하였다. 그 결과 귀금속보석 업체들을 중심으로 한 산업사적인 접근이 가능하여 연구를 진행하게 되었다. 수집한 자료를 통해 귀금속보석업체의 시대적 전개 과정과 정부, 업계, 소비자 측면에서의 특징을 도출했다. 연구 결과는 다음과 같다.
시대적 전개 과정은 1955년을 기점으로 광복~1954년, 1955~1969년까지 두 시기로 나누어 고찰하였다. 광복 이후 6.25전쟁 전까지 귀금속보석상들의 신문 광고 문구를 근거로 당시의 영업 상황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금과 은, 백금을 주로 취급하였으며 규모가 큰 경우는 보석과 시계를 판매하였고 세공과 시계 수리도 겸하였다. 종로와 충무로, 남대문 일대에서 영업하였다. 금값이 폭등하고 밀수출이 성행하자 정부는 1947년 귀금속에 대한 등록제를 실시하였으며 1950년에는 귀금속과 보석에 소매 물품 가격의 40%를 물품세로 부과하였다. 전시 중에는 귀금속이나 보석으로 된 장신구는 착용을 금지하는 ‘전시생활개선법’이 추진되었다. 전쟁 후에는 미도파 백화점 부근을 중심으로 고급 귀금속보석 상권이 형성되었으며 가장 대표적인 업체는 정금사였다. 1963년에는 서울의 귀금속보석상 수가 약 130개, 1966년에는 약 280개로 증가하였다. 1967년에는 전국금은상연합회가 창립되었으며 태극표지의 검인제도 실시하였다.
정부, 업계, 소비자 측면에서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정부는 지속적으로 귀금속보석업을 억제하는 정책을 실시하였다. 1961년에는 귀금속에 물품세를 10% 부과하였으며 1968년에는 보석과 보석 제품에 50%를 부과했다. 어려움 속에서도 업계는 국내산 자수정을 통해 외화 획득과 성장에 대한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일본과 홍콩 등지로 수출을 하였고 방한한 외국 관광객들이 가장 선호하는 쇼핑 품목으로 자리잡았다. 소비자들은 탄생석과 보석, 해외 유행 경향, 스타일링하는 법, 해외 유명보석상 등 다양한 정보들을 접할 수 있었으며 소득 수준의 향상과 더불어 1960년대 말에는 거래가 급증하였고 다양한 보석들이 유통되었다.
위와 같은 연구 결과를 통해 정부의 억제 속에서도 귀금속보석업계는 상당히 역동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소비자들 역시 향상된 구매력과 정보력을 바탕으로 귀금속과 보석에 대한 관심이 상당히 고조되어 있었고 이는 다양한 보석들이 유통되는 결과를 가져와 여러 보석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소비자들이 관심을 가질만한 당대의 이슈와 트랜드에 민감한 신문기사의 속성을 고려할 때 귀금속과 보석에 대한 당시의 많은 정보들은 시장의 발전과 소비자들의 반응이 상호작용된 결과라고 본다. 또한 경제가 발전되면서 분출되는 경제 주체들의 힘을 정부가 일방적으로 계속 막기 힘들다는 것도 확인할 수 있었다. 국산 자수정의 호조 사례는 역으로 정부가 귀금속보석산업의 가능성을 인지하게 되어 정책적 변화를 일부 가져와 1970년대에 이리귀금속가공단지를 조성하게 된 계기로 작용하였다. 종합해 볼 때 이 시기를 일시적 쇠퇴기로 본 선행연구와는 달리 국내 귀금속보석업이 산업화로 나아가는 토대가 조성된 시기로 보아야 할 것이다.
현재 귀금속보석산업에 대한 정책은 이 시대에 비해 비교적 완화가 된 상태이다. 인플레이션과 경제발전에 따라 개별소비세의 기준 금액도 상향되어 왔으며 서울시는 도심형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선정하여 2015년 종로에 서울주얼리지원센터도 설립하였다. 그러나 세재 측면에서는 풀어야 할 숙제가 많다. 특히 금에 10%의 부가세를 부과하는 국가는 한국이 유일하다. 1961년에 부과되어 야기된 갈등이 현재까지도 계속 되풀이되고 있다. 이는 업계뿐만 아니라 일반 소비자들의 실물 금 매수까지도 기피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고 있다. 금은 인플레이션을 헷지할 수 있는 중요한 가치 저장 수단의 하나로 투자의 대상이자 위기를 대비할 수 있으며 전 세계 어디서나 통용되는 준화폐적 기능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각국의 중앙은행도 금을 비축하고 있으며 면세가 일반적이다. 1960년대 후반에 국내에서 귀금속보석 거래량이 증가한 기저에는 인플레이션에 대한 소비자들의 인식과 대비도 작용했을 것으로 추측한다. 2019년 세계금협회(World Gold Counsil)에 따르면 한국중앙은행의 금 보유량은 전체 외환보유액의 1.1%에 불과해 전세계 최하위권이다(Baek, 2019). IMF 외환위기 때 금 모으기를 겪었음에도 지금까지 변화가 없으며 개인과 국가의 부의 축적을 어렵게 하고 있다. 앞으로 반드시 시정되어야 한다고 본다.
일간지의 기사를 수집해 진행한 연구의 특성상 연속적 흐름과 인과 관계를 명확하게 밝히기 어려운 한계가 있다. 다양한 키워드로 확장해 가면서 최대한 조사했지만 전후 맥락을 연결할 수 없어 덮어둔 자료들이 많이 있다. 생존해계신 원로분들의 증언과 협회나 개인이 보유하고 있는 자료를 꾸준히 발굴한다면 후속 연구로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 외에 당시에 발간된 여성잡지에 나타난 주얼리 디자인과 세공 기술에 대한 분석이 향후 연구과제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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